운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동서양의 반응은 많이 다릅니다. 대체로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서구 문명권에서는 운명에 대한 저항과 극복이 강조됨에 반해 그렇지 못한 동양권은 대체로 운명에 대한 수용과 체념을 미덕처럼 간주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운명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며 살아야 하는 곳이 있다면 가정일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었을까?’ ‘어쩌다 저런 사람이 내 남편, 내 아내가 되었을까?’ ‘어쩌다 저 사람이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되었을까?’ ‘어쩌다 저런 아이가 내 아들, 내 딸이 되었단 말인가?’ ‘어쩌다 나는 이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어쩌다 나는 이런 불행한 모습으로 살게 되었을까?’ ‘어쩌다 나는00처럼 잘생기지 못하고 이렇게 못생긴 자로 태어났을까?’ ‘이것이 과연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길을 가던 중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2). 이런 운명에 대한 질문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운명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실존에 대한 책임전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의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에 근거한 인과론이나 운명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불행은 그의 숨겨진 어떤 죄 아니면 그 부모의 죄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과론자도 운명론자도 아니셨습니다. 차라리 그분의 생각은 오늘의 실존주의자에 가까우셨습니다. 실존주의자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실존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각자는 유일하며, 각자가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나의 나 됨에 대해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신뢰하라.

본문 3절에 보면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이 사람이 자기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후 더욱 의미심장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의 불행의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기억하는 바울 사도의 위대한 고백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여기 모든 것이란 단어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행한 운명, 가슴 아픈 상처들도 다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운명의 어두운 슬픔이 우리의 가슴을 짓누르는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의 생애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는 어려서 꿈 이야기 한번 잘못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사 구덩이에 던져짐을 당하게 됩니다. 또 애굽 땅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가까스로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억울한 옥살이를 감수하게 됩니다.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애굽 땅에 양식을 구걸하러 온 자가 형제들을 만났을 때 요셉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7-8). 여기서 요셉의 고백적 대화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선하신 주권을 신뢰한다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운명은 없습니다.

3. 소명을 발견하라

예수님은 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고 선언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이를 계기로 그가 이 땅에 오신 소명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우리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소명에 우리를 포함시키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함께 수행해야 할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명이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 사는 이유입니다. 그 소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빛 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일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이 소명을 위해 예수님은 이 맹인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십니다. 거기서 그가 눈을 떠 빛 되신 주님을 발견하도록 말입니다. 주님의 기적을 경험한 이 사람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9:25). 이제 그는 참빛이신 예수의 증인 된 소명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순종이 그를 증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9:7)는 이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운명으로 찾아온 불행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실로암의 기적은 없습니다. 이 운명의 밤에도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소명의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