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롤 모델을 제시 합니다. 그 롤 모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되고그러나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 하시고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롤 모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우리가 모델링해야 할 삶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신 삶입니다.

2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진실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우리의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가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자기희생의 삶입니다. 오늘날 전도가 잘 안 되는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심이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습니까? 과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형태가 비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여 좀 더 이타적이고 좀 더 희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평소에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삶을 날마다 연습하고 계신지요? 십자가에 매달린 시간에서 조차 당신 옆에 매달린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며 위로하시던 주님처럼 살고 있는 것일까요?

2. 도덕적 시험을 극복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처럼 시험을 직면하며 사셨다고 증거 합니다.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그래서 저는 예수님도 우리처럼 성과 돈과 권력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험들을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도덕적인 시험의 밑바탕에 도사린 것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실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의 성을 탐하는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남용하여 이웃들을 무너뜨리는 모든 과도한 시도가 곧 더러움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족한 줄 모르고 탐함이 바로 탐욕입니다. 그것이 결국 음행과 더러움, 그리고 탐욕의 죄들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은 마땅히 이런 시험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절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5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너희도 정녕히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니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사단이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예수님의 응답을 기억하십니까? 4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다만 그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섬기지 말고, 성을 섬기지 말고. 권력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더 재미있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그리로 달려가는 순간, 바로 그때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오직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경배함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고 최고의 기쁨을 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를 닮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입니다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날, 우리는 이 모든 시험에서 자유 할 것입니다.

3. 감사의 언어로 빚어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만드는 중요한 한 열쇠가 우리의 언어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을 했습니다.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우리의 삶을,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만나고 모셨다면 이제 우리는 주님의 언어생활을 닮아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언어생활의 핵심이 바로 감사였다고 믿습니다. 1125절의 예수님의 기도문 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 그분의 기도 요11:41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 기도하든지 말하든지 흘러나오는 말이 이 감사의 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자와 비신자의 삶의 가장 현저한 차이가 바로 이런 감사의 언어라고 믿습니다. 감사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감사의 언어를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이 우리를 지배할 뿐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우리가 진실로 예수 믿고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면 이제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새 언어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감사의 언어를 학습해야 합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했더니 나사로가 다시 살았습니다. 감사가 친구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감사했더니 사형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범사가 감사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감사의 언어로 새 삶을 사십시오.